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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소감

일쌍 2007/11/15 22:40
이번 수능 소감

"손금엔 맑은 강물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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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念(생각할 념) 2007/11/14 17:16
너희가 증오를 노래한다면, 나는 너희에게 멸망을 선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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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냥 아무때나 볼 수 있는 사진은 아니니까

그리고 멋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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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근황 3

일쌍 2007/10/20 19:47
성대 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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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 [단서를 안고 사라진 장본인]

타이타닉 침몰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뉴욕의 상류층은 당시 "억만장자들의 선장"으로 알려진 스미스 선장에게 경의를 표하는 만찬을 개최하였다. 그는 당시 대서양 회단항로에 있어서 가장 경험이 많고 인간관계에 재치가 있는 선장으로 손꼽혔다. 그런데 왜 이러한 스미스 선장이 한밤에 거대한 타이타닉호를 빙하더미의 바다사이로 고속질주시켰을까?

스미스는 1850년에 영국 '스테포드쉬어'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형이 조정하는 배로 세계일주를 하곤 하였다. 1880년에는 타이타닉의 제조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에 입사한후, 타이타닉의 자매선인 '올림픽'을 포함한 많은 신규선박의 처녀운항을 관담해온 경력을 지니고 있다.

항해기록에 의하면, '올림픽'호의 처녀 운항을 출범할 당시 신비롭게도 배가 무언가에 부딛혀 근교 벨파스트 항구에서 프로펠러의 수리를 한 적이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스미스 선장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조종실에서 유유히 배와 함께 가라앉지는 안은 것으로 추종된다. 배가 침목하기 직전에 바다에 뛰어 들어, 주위에 헤엄치는 생존자들을 구명보트로 인도하였으나, 자신은 보트에 올라타지 안았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가능성이 많다.

당시 부인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던 스미스는 타이타닉 항해이후 곧바로 은퇴할 예정이었다. 이때문에 한 친척은 "어떻게 생각하면 차라리, 역사적인 배와 함께 가라앉은 것이 더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언급하였다.



2.프레데릭 플리트 선원 [빙하를 처음으로 목격한 사나이]

선원 플리트는 1912년 4월 14일 저녁에, 타이타닉호 선상 15미터위에 위치한 전망타워에서 항해 망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망원경은 출발항인 사우스햄톤에서 실리지안은 상태였다.

자신의 교대시간의 마지막 한시간을 남겨두고, 선체 500미터 정면에 대형 빙하를 목격하였다. 곧바로 조정실에 알린결과 선박은 급턴을 하여 작은 진동과 함께 소량의 얼음이 갑판위에 흩어질뿐, 큰 고비를 면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2시간 이후에 플리스 선원은 구명보트를 지으며 여성들을 구조하여야만 했다. 플리트는 참변이후 1936년까지 배를 탔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신문배달을,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며 보냈다. 무척 외로운 성격으로 1965년에 부인이 사망하자, 얼마안되어 마당 빨래줄에 목매달아 자살하였다.



3.벤자민 구겐하임 [멋지게 간 억만장자]

스위스에서 이민온 철강사업의 억만장자 메여 그겐하임의 7남중 6번째인 벤자민은 최신 현지처인 프랑스 가수 레오틴 오바와 쉐르브르그에서 타이타닉호에 탑승하였다. 구겐하임은 타이타닉호의 운명이 확인되자, 하인과 자기방으로 향한뒤 턱시도로 갈아입는다. "뉴욕의 부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달라"며 선원에게 구명조끼를 거부한 구겐하임은 그 자리에서 현지처와 하인이 무사히 구명보트에 탄것을 확인한뒤,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예복을 입고, 신사답게 갈것이다"라고 선언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구겐하임 부인은 남편없이 몇개월씩 보내는데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호화생활도중에 투자실패때 거액을 날린것으로 알려진다. 구겐하임의 명예로운 죽음은 일가에게 도움도 됐겠지만, 3자녀에게 소액의 재산만을 남기어, 나중에 딸이 불평할 정도였다고한다.



4.왈레스 하틀리 [마지막 바이올린의 연주가]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순간까지 바이올리니스트 하틀리가 이끄는 8인조밴드의 음악이 같이했음은 확실하다. 배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그들이 과연 무슨곡을 연주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안으나, 당시 선호곡은 이브닝풍의 왈츠와 교회힘이었으며, 평상시 하틀리는 "만약에 우리가 탄 배가 가라앉는다면 '신 그대 가까이' 혹은 '지난시절의 구세주인 신이여'를 연주할 것"이라고 자랑하곤 하였다.

하틀리는 1878년 영국 콜른에서 보험판매원인 아버지곁에 태어나, 학교에서 바올린을 전공한 뒤, 무려 70개 호화선박의 항해에서 음악을 맡아왔다. 당시 보스톤 스파의 마리아 로빈손과의 약혼으로 그녀곁을 따나지 안으려 했지만, 역사적인 선박의 항해에 마지막으로 가담해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진정한 에드워디안 전통마냥 개인 이전에 임무를 우선으로한, 타이타닉이 낳은 영웅이다. 고향인 콜른에는 3미터 높이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장례식에는 4만명의 인파가 몰려왔다.



5.존 제이콥 & 마델렌 아스토 [타이타닉 최고의 부자]

이동하는 부자촌이었던 타이타닉호 내에서도'죤 제이콥 아스토-4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부자였다. 아스토 부부는 하인단과 함께 '쉐르브르그'에서 선상 하였다. 이들이 탄 특실은 당시 4천불 [현재 7만불] 로 화롯가를 비롯하여 실제 호화주택같이 마련되었다. 아스토는 부동산과 가족이 이어온 모피사업으로 번 8,700만불의 재산 외에, 터바인 엔진과 자전거 브레이키등 하버드 대학 졸업이후 등록한 각가지 발명, 그리고 토성과 목성에서의 인간의 생활을 그린 공상과학물의 수입이 쏟아져 들어왔다. 심지어 스페인/미전쟁때 자신 고유의 대대에 자금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아바 윌링과 10년 이어진 첫 결혼에서 2명의 아이를 나았다. 하지만 그가 46세에 달하던 1911년에 18살난 마델렌 포스 와의 결혼은 스캔달을 나았다. 살피는 눈을 피하기 위하여 둘은 유럽과 이집트 여행으로 떠났었다. 그리고 이때 5개월 임신 중이었던 마델렌은 아기를 미국에서 낳기 위하여 타이타닉호에 승선한 것이다. 참사직후에 구명보트에 대피시, 아스토는 이 특별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담당선원에게 구명보트에 태워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노숙히 시가를 피웠다고. 아스토 부인은 1912년 8월14일에 태어난 아기에게 '죤 제이콥 아스토-5세'의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후 2번 결혼하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6.제이 블루스 이즈메이 [참사의 장본인]

타이타닉호 소유회사 이사인 이즈메이가 실제 영화에서 디너 테이블의 내프킨에 항해의 첫 지시계획을 그린 것처럼, 과연 진짜로 홍보효과를 위해 배를 전속시키도록 명령했는지는 알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49세의 그가 배에 가득찬 승객과 하인과 비서와 그의 명예를 놔둔체, 마지막 구명보트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갑판위에 남은 사람이 더이상 없었다"고 변명한 그는, 구명선 '카파시아'호의 남은 항해에서 계속 고립되어 있었다. 차후 범죄혐의는 벗어났지만, 언론에서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안았고, 당시의 상류층 남성들이 가입해있던 존엄한 런던회에서도 심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1913년에는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화이트 스타 라인'의 회장직을 내논후, 미국부인 쥴리아 프로렌스와 함께 아일랜드 서부에서 요양하다 1937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7.이시도&스트라우스 [같이 가기로 선택한 부부]

유명한 자선가이자 뉴욕 맨하탄 한복판의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스트라우스 부인은 구명보트에 탈 권유를 두번이나 뿌리치고 남편과 마지막 순간을 같이하였다. 이사실은 알게된 6명의 자녀와 친지들도 이 선택에 대해 놀라지는 안았다. 둘은 서로 생일잔치도 항상 같이 치루는가 하면, 헤어져있을 때에도 매일 편지를 교환할 정도였기에. 타이타닉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 선원들이 구명보트에 탈 것을 권유하자, 이다는 대신 하인을 태우고는, "이제 이것도 필요없을 것이라며 입고 있던 모피코트마저 건네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두번째 보트에 강제로 태워진후 남편이 물러서자, 이또한 뿌리치고 나와 67세의 남편과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 뉴욕 브론크스 묘지의 돌담에는 "물은 사랑을 채울수 없는 반면, 사랑을 죽이지도 못한다"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출처는 지식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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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이야기

Veritas 2007/10/19 21:35

1912년 4월14일 밤 11시40분,엄청난 참사가 북대서양에서 일어났다. 세계 최대 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딪혀 1,500여 목숨과 함께 가라앉았던 것이다. 영국은 타이타닉을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불침선(不沈船)이라고 장담했다. 높이 30m,너비 28m,길이 270m,무게 4만6,000t으로 지구 위에서 첫째 가는 큰 배였으니,누가 보아도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배는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처녀 항해에 나선 지 겨우 4일 17시간30분 만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말았다. 이 사고로 배에 탄 2,208명 가운데 1,513명이 목숨을 잃었다(여러 기록이 엇갈리므로 실제 죽은 사람은 더 많으리라고 한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맑았고,사람들은 갑판을 산책하거나 일광욕을 했다. ‘물 위에 뜬 궁전’의 호화로운 시설들은 승객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타이타닉 호의 앞길에 빙산이 떠다니고 있음을 알리는 첫 무전이 들어온 때는 오전 9시였다. “타이타닉 호 선장에게. 북위 42도,서경 49∼51도 바다에 떠돌이 빙산이 있음. 캐로니아 호로부터.” 정오에는 발틱 호로부터 비슷한 무전이 들어왔고,오후에도 타이타닉 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지나던 캘리포니안 호로부터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왔다.

배에는 승무원들말고도 타이타닉을 지은 화이트스타 회사의 브루스 이스메이 전무와 설계사 토머스 앤드루스도 타고 있었지만,누구도 이 무전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항해사와 당번들에게 바다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속도를 늦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여객선들은 도착 시간을 꼭 맞추어 대는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었는 데다,어느 누구도 빙산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자만심에 들뜬 승무원들을 태우고 타이타닉은 22노트라는 엄청난 속도로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다.

밤이 되자 날씨가 매서워졌다. 밤 11시에 캘리포니안 호로부터 또 무전이 들어왔다. “여보세요,우리는 빙산에 둘러싸여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배와 교신하고 있던 타이타닉의 무선사는 벌컥 짜증을 냈다. “끼어들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남의 무전 교신을 방해하고 있소.” 면박당한 캘리포니안 호의 무선사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일이 끝나는 11시30분이 되자 무전기를 끄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타이타닉 호의 망대에서 바다를 살피고 있던 당번이 이상한 물체를 발견한 시각은 밤 11시40분 조금 못 되어서였다. 처음에는 작아 보였지만 점점 크게 다가왔다. “빙산이다!” 나지막한 부르짖음이 그의 목구멍에 걸렸다. 그는 엉겁결에 망대에 달린 종을 세 차례 울렸다.“뭐가 보이는가?” 전화기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바로 앞에 빙산입니다!” 일등항해사 윌리엄 머도크는 얼른 키잡이에게 소리쳤다. “우현으로 끝까지!” 키잡이가 있는 힘을 다해 타륜을 돌리자,머도크는 잇달아 외쳤다. “전속으로 후진!” 키잡이가 다시 타륜을 돌리자마자 타이타닉은 아슬아슬하게 빙산을 비켜 갔다. 그러나 사실은 물 속에 잠긴 얼음덩어리에 옆구리를 들이받힌 뒤였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잠을 자고 있거나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그들은 배의 옆구리가 뭔가에 긁히는 듯한 가벼운 느낌을 받았다. 갑판에서 밤바다를 구경하던 몇 사람만이 오른쪽을 스쳐 가는 빙산을 우연히 보았다. 빙산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타이타닉은 항해를 계속했다. 그릇이 덜그럭거리거나 뭔가 긁히는 것 같은 느낌에 잠깐 긴장했던 사람들도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타이타닉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싶었다. 그러나 그때 배 오른쪽의 6호 보일러실에는 바닷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순식간에 4m 높이로 물이 찼다. 스미스 선장은 급히 설계사 앤드루스와 함께 배를 점검했다. 제1 선창,제2 선창,우편실,6호 보일러실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물에 잠겨 있었다. 배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타이타닉은 어느 한 곳에 물이 들어와도 다른 곳에는 번지지 않도록 격벽(隔壁)을 16개나 만든 배지만,워낙 큰 구멍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니 그 엄청난 수압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계산해 보니 배가 가라앉기까지는 겨우 90분이 남아 있었다. 스미스 선장은 구조 신호를 보내라고 통신사에게 말하고 이어 구명보트 내릴 준비를 명령했다. 그러나 구명정 16척과 조립식 보트 4척은 고작 1,200명밖에 못 태운다. 나머지 300여명의 목숨은 구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자정 무렵. 뉴욕을 떠나 지중해로 가던 카르파티아호의 통신실. 무선사 H T 포텀은 옷을 벗고 구두끈을 풀었다. 그는 자리에 누우려다가 문득 타이타닉호를 불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낮에 우연히 타이타닉의 무선사가 캘리포니안호의 무선사를 면박하는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타이타닉의 무선호출부호 ‘MGY’를 발신하자마자 너무나 놀라운 응답이 튀어나왔다. “CQD CQD SOS S0S. 즉시 와주시오. 우리는 빙산에 부딪쳤소. 여기는 북위 41도,서경 50도 14분. CQD SOS!” 코텀은 옷도 입지 못한 채 뛰어올라가 당직 항해사에게 보고했다.

카르파티아호는 지체없이 뱃머리를 돌려 그 배가 낼 수 있는 14노트보다 더 빠른 17노트로 달렸다. 코텀은 무선실로 돌아가 즉시 타이타닉에 알렸다. “MGY, 네시간 안에 가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코텀은 송신기를 껐다. 다른 배들이 타이타닉으로부터 구조요청 신호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타이타닉으로부터 SOS를 받은 배는 카르파티아말고도 두 척이 더 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과 가장 가까운,한 시간도 안되는 10해리 거리에 있었던 캘리포니안호만은 끝내 구조요청 신호를 받지 못했다. 타이타닉의 무선사에게 모욕을 당한 캘리포니안의 무선사는 그 시간에 무선기를 끄고 잠들어 있었다. 대피 명령이 내려,잠자리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갑판으로 나온 타이타닉호 승객들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은 지시에 따라 구명대를 걸치고서도 다른 사람의 차림새를 손가락질하며 낄낄대고 있었다. 선원들이 여자와 아이들 먼저 보트에 타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저 작은 배에 타느니 차라리 여기 남겠소.”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더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4월15일 0시45분. 긴급구조를 바라는 신호탄이 밤하늘에 불꽃을 터뜨리자 사람들은 비로소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다. 이미 배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고 있었다. 갑판은 삽시간에 어지러워졌다. 가톨릭 신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며 고해성사를 베풀었고,악단은 감리교 찬송가 ‘가을’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망망대해에서 우리를 지켜 주소서”라는 찬송가를 함께 부르며 두려움을 이기려고 애썼다.

남편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배에 남는 부인도 있었고,멋진 야회복으로 갈아입고 기품 있게 죽음을 맞으려는 신사도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는 길이던 가난한 아일랜드 어린이들은 3등 선실 갑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남편과 함께 죽음을 택한 사람은 메이시백화점 스트라우스 회장의 부인 아이다와 앨리슨 부인이다.

앨리슨 부인의 세살배기 딸 로렌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부짖어,1등 선실 어린이 29명 가운데 유일하게 타이타닉에 남아 죽음을 맞았다. 이 와중에서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계속 보트로 옮겨 탔다. 마지막 보트 두 척을 미처 내리기 전,1912년 4월15일 오전 2시20분 타이타닉은 수천명의 울부짖음과 엄청난 폭음을 남기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 빙산과 부딪친 지 2시간20분 만이었다. 오전 3시55분쯤 되어 카르파티아호가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타이타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밤바다에는 초록빛 등불을 단 구명 보트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물결을 따라 넘실대고 있었다. 첫 번째 보트에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사이에 날이 밝아 왔다. 사고 해역에는 여기저기 빙산이 널려 있었고,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을 새까맣게 태운 보트들이 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카르파티아호에 먼저 닿으려고 힘껏 노를 저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다 여자였고,남자 선원 한 사람씩이 보트를 이끌고 있었다. 노를 빨리 저으려고 ‘뱃사람이여,기슭으로 저어가세’라는 뱃노래를 부르는 보트도 있었다. 오전 8시40분. 마지막 구명 보트로부터 75명이 카르파티아호에 옮겨 탐으로써 구조 작업은 막을 내렸다.

구조된 보트는 모두 17척,살아난 사람은 1,530명.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마침 카르파티아호 선실은 반 넘게 비어 있어서 생존자들을 태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구조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캘리포니안호가 그곳에 왔다. 그들은 카르파티아호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카르파티아호는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사실을 알려주고,자기네는 급히 뉴욕으로 돌아갈 테니 그곳에 남아 주검들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했다.

캘리포니안호는 한 시간 가까이 수색했지만 주검은 단 한 구도 찾지 못했다. 물론 생존자는 없었다. 영하 2도나 되는 차가운 물에서 일곱 시간이 넘도록 살아 남은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큰 빙산에 걸려 눈에 띄지 않았던 주검들은,1주일 뒤 다른 배에 306구나 발견되어 대부분 바다에 장사 지내졌다.1971년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해양지질학자 로버트 밸러드는 타이타닉호를 찾자고 제안했다. 그는 배를 발견하기만 하면 자기가 직접 잠수정을 타고 바다 속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1978년에도 했지만 돈을 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밸러드의 생각으로는 그 무렵의 해양 탐사 장비라면 타이타닉호를 찾을 수 있었다. 1963년에 침몰한 미국 원자력 잠수함 드레셔호와 1968년에 침몰한 소련 골프 2급 잠수함을 찾아 끌어올리면서 심해 탐사 장비들이 눈부시게 발달해 있었던 것이다.

1980년 잭 그림이라는 지질학자가 밸러드에게 돈을 대겠다고 나섰다. 그는 네스 호수의 괴물과 아라랏산에 있다고 하는 노아의 방주,히말라야에 산다는 설인 예티를 찾는 일에 돈을 댄 적이 있었다. 그 세 가지는 다 실패했는데,그는 네 번째로 타이타닉을 찾는 일에 도전했다. 잭 그림이 타이타닉을 찾는 일에 돈을 대기로 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컬럼비아대학의 해양학자 윌리엄 라이언이 그림을 만났다. 그는 그림에게,1963년 드레셔호를 찾아낸 기계는 자력계(磁力計)였지만,타이타닉이 가라앉은 곳은 북대서양에서도 자력이 무척 센 화산지대 근처이므로 스캔소나(수중 음파탐지기)를 쓰라고 충고했다.

밸러드와 그림과 라이언,거기에 사이드 스캔소나를 만든 프레드 스파이에스는 1980년 7월30일부터 8월16일까지 1300평방㎞에 이르는 넓은 바다 밑을 음파탐지기로 수색하다가 돌아왔다. 1981년과 1983년에도 시도했지만 날씨가 나빠 실패했다.밸러드는 세 번이나 실패했어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탐사 지역을 좁히려고 프랑스 해양연구소의 장 자리와 장 미셸 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셸과 밸러드는 1973년 대서양중앙해령을 탐사할 때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관해 쓰여진 모든 항해일지와 기록을 찾아 샅샅이 뒤졌다. 덕분에 배가 가라앉았을 만한 곳을 20평방㎞ 이내로 좁혔다. 1300평방㎞에서 20평방㎞로 좁히다니! 엄청난 성과였다.

1985년 6월,미국 해군이 밸러드에게 22만달러를 대기로 했다. 해군은 타이타닉 탐사를 하면서,사람이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카메라와 비디오를 통해 바다 속을 뒤지는 ‘원격조종 탐사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해군이 만든 심해 탐사용 잠수정을 3900m 깊이에서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1985년 7월11일부터 8월7일까지 밸러드 일행이 탄 르 시르와 호는 긴 쇠줄 끝에 프와송(생선)이라고 불리는 음파탐지기를 매달고 바다 밑을 뒤졌다. 거기에는 사이드 스캔과 수직 소나가 함께 달려 있었다. 다른 쇠줄에는 자력계를 매달았다. 음파탐지기가 물체를 찾아 모니터에 비추면 자력계가 쇠붙이인지 아닌지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빠른 해류와 거센 바람 탓에 대원들은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8월13일 밸러드와 미셸은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보낸 탐사선 노르 호로 갈아타고 다시 탐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 연구소가 새로 만든 잠수정 아르고 호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르고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야손 일행이 황금양을 찾아 나설 때 탔던 배 이름이다. 아르고 호는 자동차만한 크기로 썰매 모양을 했는데,강력한 음파탐지기와 탐조등,고성능 카메라를 갖추고 있었다. 아르고 호는 6,000m 깊이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잠수정으로서 사람들은 노르 호 선실에 편안히 앉아 아르고 호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거센 파도와 물결에 부대끼면서 탐사했다. 그러나 타이타닉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원들은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8월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얼마 안 있으면 돌아가야 할 철이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타이타닉을 찾을 희망은 자꾸 엷어졌다. 8월31일 밤 미셸은 밤 12시부터 9월1일 새벽 4시까지 당직을 서려고 관제실로 나갔다. 그 시간대는 제일 힘겨운 때였으므로,믿을 만한 미셸이 당직을 서기로 되어 있었다.

9월1일 0시30분 조금 지났을 때였다. 문득 석탄과 긴 파이프 같은 것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미셸의 가슴이 뛰었다. 함께 당직을 서던 항해사와 비디오 기술자,소나 전문가 여섯 사람도 꼼짝하지 않고 화면을 지켜보았다. 5분쯤 지나자 커다란 보일러 같은 것이 화면에 나타났다. “누가 가서 밸러드를 깨워야겠어!” 미셸이 말했으나 아무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이 가슴 벅찬 순간에 누가 화면에서 눈을 떼려 하겠는가. 얼마 뒤 요리사에게서 보고를 받은 밸러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화면에 나타난 보일러를 보자 큰소리로 외쳤다. “바로 저거야!”

한 바탕 뜨거운 순간이 지나간 뒤 그들은 묵념을 했다. 그 시간이야말로 74년 전 타이타닉 호가 바닷물에 잠기고 수많은 사람이 파도에 휩쓸려 죽어가던 시간이 아닌가.다음 이틀 동안 바람은 40노트,파도는 4m 넘게 솟구쳤다. 노르호를 돌려주기로 한 날이 며칠 남지 않아 밸러드는 악조건에서도 24시간 탐사에 매달렸다.

아르고호는 물 속 3,900m에서 쉴새없이 타이타닉호를 맴돌며 사진을 찍어 모니터로 전송했다. 포도주병,매트리스,전신기,마스트,닻 사슬…. 날마다 수많은 잔해가 화면을 메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의 앞부분만 보였지 뒷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타이타닉호가 두 동강 난 사실을 알았다.

1986년 7월14일 2차 탐사가 시작되었다. 밸러드는 탐사선 애틀란티스 2호에서 잠수정 앨빈호로 갈아탔다. 앨빈호는 6,750m 잠수테스트에 합격했고,1960년 이후 지금까지 100개가 넘게 만들어진 유인잠수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능과 업적을 자랑한다. 밸러드를 비롯한 과학자 세 사람은 앨빈호 속에서 ‘제이슨 주니어’라는 로봇을 원격조종해 타이타닉호의 계단 통로를 따라 선실로 들여보냈다. 로봇에 장착된 특수카메라가 선실 안 모습을 구석구석 찍었다. 카메라는 높은 수압과 짙은 어둠 속에서도 170 시각을 선명하게 찍었다. 1등 선실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 매달려 있었고,구리로 만든 조타실 장식품들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조사는 날마다 4시간씩 7월25일까지 12일간 계속되었다. 특이한 것은 조난자들의 뼈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곳 바닷물 속에는 무기물이 적게 들어 있어 뼈가 모두 녹아버렸거나 조류에 휩쓸려 없어진 것 같았다.

7월18일에 발견된 금고 가운데 하나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제이슨 주니어’는 어떤 잠수정도 잠수한 적이 없는 3,650m를 훨씬 넘어선 3,900m 바다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길이 71㎝ 너비 68.5㎝ 높이 50㎝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로봇은 적 잠수함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물 속의 전파탐지장치와 미사일을 찾아내는 군사용 로봇이다. 미국 해군은 타이타닉 탐사 덕분에 이 로봇의 쓰임새를 아주 잘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마지막 날 밸러드는 구리로 만든 판 2개를 타이타닉호 갑판에 얹었다. 하나는 타이타닉호 희생자 가족들의 모임인 ‘타이타닉 역사협회’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글을 새긴 것,다른 하나는 뉴욕탐험가협회가 보내온 것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은 심해 탐험 기념이랍시고 이 배를 손상하는 일을 삼가주십시오.’


(출처는 지식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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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근황 2

일쌍 2007/10/19 21:30
연대 붙었고

내일 성대 2차 면접 봅니다.

붙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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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대입

체 게바라의 유언

Veritas 2007/10/13 23:37
체 게바라의 유언을 아십니까?

그는, 어떤 병사에게 즉결 처분으로 총살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아는가,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

...아마 모르긴 모르지만,

그를 죽인 병사는 꽤나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을 겁니다.

자신을 죽인 자에게 내리는 최고의 저주,

그것은 "내가 너로 인해 죽었다." 라는 것을 최대한 각인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찌보면 최고로 악랄한 유언일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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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연습 1

일쌍 2007/10/13 00:56
칼을 든 병사가 달려온다. 곧바로, 시작한다. 기억해 낸다. 기억한다. 기억해야 한다. 읽는다. 마음 속의 각인을 읽는다. 말한다. 3미터 남았다. 맞으면 죽는다. 말한다. 말한다. 칼이 날아온다. 죽을 지도 모른다. 말한다. 말한다. 말해 낸다. 캐스팅 완료...!
"스틸 커터."
손에 쥔 단검에서 빛이 난다. 캐스팅은 성공적이다. 검은 눈 앞이다. 시간이 느려진다. 적의 동작이 느려진다. 그대로, 수직으로, 검을 검 째로 베어 낸다.
서걱, 쩔렁-
바닥에 검이 떨어진다. 병사의 얼굴에 공포가 어린다. 반대쪽 단검으로, 정수리부터 아래로. 그대로-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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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et?

About Me 2007/10/10 20:47
내 닉네임에 대해 조금 풀어 볼까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홈월드 모선 여성화


위 그림은 홈월드의 모선 여성화 그림이다.

귀엽지? <야

뭐 그건 그렇고, 내 닉네임, 스젯은 홈월드라는 대작 게임에서 유래했다.

홈월드는 게임 자체도 대단하지만 세계관이 매우 훌륭하다.

대충 설명하면,

카락이라는 외딴 행성에서 살던 사람들이 "가이드스톤"이라는 고대유물을 발견한다.

이것은 "카르-토바"라는 고대 도시에서 발견 되었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카락으로 버려진 그들의 선조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가이드 스톤은, 그들의 고향, 모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으며

키쓰라고 일컬어지는 부족들의 공통 언어로, 단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Hiigara...Homeworld"

가이드스톤의 약속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카락에 지쳐있던 그들에게 고향으로 향하게 했다.

모선을 건조한 그들은 난관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모선을 움직이는 방법이 문제였다.

모선은 너무도 거대하고 너무도 엄청나서

그것들을 모두 컴퓨터로 처리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 과학을 사랑하는 위대한 선구자들의 키쓰(부족)인 "키쓰 스젯"의 과학자인

"카란 스젯"이, 방안을 하나 내놓았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컴퓨들과 융합하여, 모선 그 자체가 되는 것.

누군가는 모선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모선이 되었다.

기억하라, 그녀의 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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